Mabinogi/N

[초대밀레] 마지막 인사

H__S 2015. 10. 17. 20:27

 

* G20 스포 및 개인적인 상상에 의해 작성된 글입니다.

 

 

잊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전부를,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글을 써내려가던 펜을 내려놓는다. 알고 있다.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것이란 것을.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써내려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허나, 나는 당신을 잊어야했다. 잊을 수 없는 것과 잊어야한다는 것 사이에서, 아이러니하게도나는 다시 펜을 들어 글을 써내려간다.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초대밀레] 마지막 인사

 

 

항상 게이트를 지날 때 마다 드는 생각이었지만 게이트 입구는 정말 컸습니다. 내가 얼마나 위로 쌓여야 그 끝에 닿을지 궁금할 정도로. 그만큼 게이트는 높았습니다. 알고 있었나요? 언제나 그 곳을 지나다녔어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보기 위해서. 사실 게이트 입구를 지나 그 안으로 들어서 아발론으로 넘어가는 문 앞에서 서성이는 게 전부였지만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시간은 너무 길었고 그 곳에서 나는 한 없이 초라해져 갔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이를 악 물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문을 두드리고 소리 쳐봐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고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 내게 그 문이 열린 건 기적과도 같았죠. 얼마나 그 곳에서 절망을 맛보았는지 모르겠어요. 바닥까지 보고 오지 않았을까요? 하하. 문이 열리자마자 기사단들과 들어간 그 곳은 어둡고 추웠어요. 지면에 닿아있는 발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는 꼭 절대 오면 안 될 곳을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얼마나 애타게 당신을 기다렸는데 물론 그런 거에 포기하지 않았죠. 선지자들도,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바랐던 것은, 그렸던 것은 당신 하나였으니까. 정말 무모했던 것 같아요. 말리는 모두를 외면하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을 보면요. 결과적으론 잘 된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아줘요. 이젠 할 수 조차 없겠지만요. 아니 들을 수 없겠지만. 생각해보니 당신과 나, 처음 대면했을 때 당신이 했던 말 기억해요?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마치 잠을 자듯 반듯하게 누워있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 만 봤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이가, 그리워했던 이가 눈앞에 있어서 이게 현실인가 착각마저 들었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만져본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울컥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시체가 아니야, 그저 잠들어 있는 것뿐이야. 이제껏 이용당해온 모든 것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이만큼 강해졌어요. 어서 눈을 떠줘요.

“..... 단장님, 일어나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불러본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끝이 떨려왔다. 혹시 너무 떨고 있진 않을까? 하고 뒤를 슬쩍 바라봤지만 다들 엄숙한 표정이어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아니 떨렸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지만. 부름에도 미동 없는 눈꺼풀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일어나세요, 단장님.’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 부른다고 일어났으면 진작 일어났을 것이다. 고개를 저은 나는 뒷걸음질 쳐 뒤로 물러나려했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대로 중심을 잃고 주변의 물속으로 빠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

헤엄 쳐 빠져나오려했지만 밑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듯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톨비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 어째서? 그들은 마치 멈추어버린 것처럼 아까의 모습 그대로 단장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멈춰버린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잡아당기는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며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산소를 들이쉬고 싶은 욕구에 몸에 힘이 들어가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너는 나를 깨우러 와선 내가 널 깨우게 만드는 군.

몸을 흔드는 느낌에 떠지지 않는 눈을 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차가운 빛의 갑옷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갑옷과 익숙한... 투구? 투구.... 파란색의... 설마. 허망하게 뱉어진 단장님?’ 말에 앞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봉인 당해 누워있을 사람이 왜 깨어있지? 난 왜 누워있었던 거지? 천천히 기억을 더듬다 그제야 물에 빠졌던 것을 기억해냈다. 물에 빠졌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았고, 그 다음엔 끌려 들어와. 멍하니 흘러가는 의식 속에서 그래, 나는 끌려 들어와서 정신을 잃었는데 이 빈 공간은 어디냐고? 하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제가 여기 누워있죠? 여기는 어디죠?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군...

그리고 당신은 봉인된 상태 아닌가요? 언제 봉인이 풀린 거죠?

하나씩 질문 해줬으면 좋겠는데. 네 몸의 신성력에 봉인이 반응해 여기로 오게 된 거다훔쳐본 자여. 이 곳은 내 의식의 세계이자 봉인된 공간이지. 네가 여기에서 출구를 찾기만 한다면 봉인은 풀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밖의 세계에선 봉인이 풀리지 않은 상태지.

......! 그럼 아직 봉인이 안 풀린 거군요. 출구는 어디죠?

그건 이제 네가 찾아야 할 문제지. 나는 이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장의 말에 속 안에서부터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 안에서 출구를 찾아야했다. 어떻게 생긴 건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제로의 상태로. 얼굴을 구기고 생각하고 있자니 단장이 작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구긴 상태로 고개만 홱 돌려 노려보자 웃음을 멈추곤 입을 연다.

간단하다. 여기는 의식의 세계. 네가 출구를 원한다면, 나타날 것이다.

 

*

 

사실은 기절한 거였지만, 아니 그렇잖아요? 생각해봐요. 누가 물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하지 않고 살아있냐고요. 아 이제와 생각해보니 단장님 말 엄청 억지였네요. 날 기절시켰으니 당연히 당신이 깨운 거죠. 에라이. 어쨌든 그 첫 마디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요? 당신을 깨우러 간 날 오히려 당신이 깨웠다는 거. 근데 생각을 해봐요, 당신이 날 안 깨웠으면 나는 안 일어났을 거고 그럼 당신을 깨우지도 않았겠죠. 상부상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퉁쳐요. 거절은 안 받아요. 못 받는 거니까. 당신이 봉인에서 풀리고 모든 게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다행이었어요. 만약 ... 내가 잘 못해서 우리 둘 중 하나가 사도가 되어버렸다면, 끔찍하네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분명 하나는 죽었을 거니까... 결국 끝은 이별이겠지만 그렇게 빠른 이별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당신과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짧은 시간이었고, 결국 고백하진 못했지만 대화할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어요. 눈을 뜨고 돌아다니는 현실에서의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진짜로.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속이 쓰려요. 왜 그때 말하지 못 했을까, 조금 더 다가가지 못 했을까. 내 속마음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좀 더 가까워져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을까요? 왜 이리도 머저리 같아서 마지막에서야 당신의 말을 듣고... 후회해버렸는지. 일찍 당신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우리 조금은... 서로를 더 알 수 있었을까요?

 

*

 

밀레시안.

두근, 심장이 뛰었다.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 돌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여러 쌍들의 눈동자들이 황급히 사라지는 게 보였다. 주목 당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기 위해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숨을 깊게 들이 내쉬며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야 남자에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단장?

너무 딱딱하게 말이 나가버린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와 틀어지고 싶진 않았다. 내 말 하나하나가 거슬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대로 말이 나간 거면 좋을 텐데.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에 입술을 씹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들이 흉흉하다.

네가 떠나기 전에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바쁜 가?

아뇨,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세요.

여긴 나나 자네에게 둘 다 불편할거라 생각되는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투구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뒤를 바라본다. 그도 저 수 많은 이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제스쳐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내보이자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를 따라가며 뒤를 한 번 바라보자 이를 악물고 있는 몇 몇 이들이 보였다. 속이 쓰렸다. 당신은, 너무 인기가 많아. 지금 이렇게 둘이 되는 것만으로도 적이 생겨버려.

 

할 말이 뭔데 여기까지 온 겁니까?

푸른색의 물결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폭포를 바라보며 등지고 서 있던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행동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목걸이 속에서 만났던, 나를 거부했던 당신. 그때로만 돌아간 것 같아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같은 장소, 같은 모습의 당신. 다른 것이라면 이 곳은 현실이라는 것과 무슨 말을 할 지 모른 다는 것. 단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밀레시안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떠난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당연하죠. 저는 여신과 약속을 했거든요.

그 약속을 파기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영원히 이 곳에서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뒷말을 삼킨다. 절대로 하면 안 돼. 그에게 기대지 마. 벼랑까지 나 자신을 몰기 시작한다. 한 번 말하면 모든 말들이 튀어나와 버릴 것 같아서. 바라보는 눈동자에 괜스레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쉽군. ...네가 가기 전에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하고 후회할 것 같군.

단장님이 후회할 정도라...?

그래. 후회할거다. 말하고 나서도 후회할지 모르겠군.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씁쓸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후회하고만 있는 듯 한 목소리에 밀레시안은 눈을 깜박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목소리만큼이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왔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눈앞의 이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만큼 가까이 걸어온 그는 손을 들어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하고 품에 안긴 몸이 굳는다. 굳은 허리를 쓸어내리며 이 자의 앞에만 서면 꿰맨 듯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그래, 좋아한다.

 

*

 

그때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그래 당신은 모르겠죠. 그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모를 거예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모를 테죠. 이 걸 읽기 전까지는. 그 말에 나도 좋아한다고 말할 걸. 후회할거라던 당신의 말에 나도 후회할 것이라는 걸 조금만 일찍 생각할 것을. 그랬더라면 그 짧았던 순간이라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사람으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을 좋아합니다. 좋아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게 되서 미안해요. 정말로 좋아했어요. 나를 바라볼 때의 그 눈도, 가끔 미소로 휘어지는 입술도, 답답할 정도로 매일 쓰고 있던 그 투구도. 다른 이들을 지휘하는 당당하고 고귀한 당신의 모습도. 모두가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당신이 앉아있는 자리도. 전부 좋아했어요. 그 많은 이들 중에 당신이 좋아하는 게 나였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기적이어도 좋아요. 당신의 마음을 알고 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녕, 나의 단장님.

 

*  *  *

 

왜 그러십니까?

말을 두던 손이 멈춘다. 모든 게 멈춘 듯 행동을 멈춰버린 이를 바라보며 톨비쉬가 고개를 갸웃했다. 체스를 두다 말고 멈춰버린 이는 이내 고개를 털더니 톨비쉬를 바라보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계속 하지.

어쩐지 슬픈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밖에서 이 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손에 편지를 쥐고 나타난 이가 헛기침을 하며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숙여보였다.

초대 단장님, 밀레시안 씨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