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큐 엔노시타x사와무라 커플링.
[엔노다이] 빈자리
하나, 둘.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에엑, 비 온다는 소식 없었잖아? 난감하네요. 다들 우산도 없어 보이고. 케이신과 타케다가 말을 주고받는다. 떠올랐던 공이 빈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뒤로 다가온 배구부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내리는 비조차 즐겁다는 듯한 히나타의 하이톤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앞에서 날뛰는 주황 머리를 꽉 눌러 잡고는 조용히 해,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비장하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전에 해산이 좋을까요?”
“음… 별 수 없지. 체육관에서 1박은 무리라고.”
케이신의 답을 받아낸 사와무라가 뒤를 돌았다. 손뼉이 마주하는 소리가 울렸다. 밖을 보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여기까지! 정리하자! 외침에 멈춰있던 발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굴러다니던 공들이 자리를 찾아가고, 먼지들이 사라져간다.
피곤하네. 요 근래 정말 바빠졌으니까. 허리를 펴는 사와무라에 스가와라가 웃었다. 지금의 카라스노는 기회를 잡을 카라스노잖아. 집어넣으려던 공이 히나타의 얼굴과 부딪혔다. 눈이 쭉 찢어진다. 승산 없는 작은 싸움이 일었다. 전과는 다른 소란이다. 이번만큼은 입을 다문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아사히…”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온다. 아사히 1점. 살려내지 못한 공이 바닥을 쳤다. 빗소리가 섞여 질척했다. 이런 날은 아사히가 되는 느낌이라고, 사와무라와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네 빈자리는 타나카와 히나타가 분명히 해주겠지. 분발하라고, 에이스다운 면모를 조금이라도 더 보여.”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모자라! 그런 소심한 성격도 말이지.”
머리 위로 먹구름이 꼈다. 아사히를 토닥여주며 스가와라가 사와무라의 말이 동의한다. 넌 하나만 하면 안 돼? 그렇지만 다이치의 말, 사실이잖아. 먹구름이 두 배다.
끝났습니다, 다이치상. 안경 너머의 시선이 셋을 훑는다. 고개를 끄덕인 사와무라가 다시 손뼉을 쳤다. 깔끔해진 체육관을 둘러보는 눈빛이 날카롭다. 다이치상, 청소 때 무서워. 히나타의 말에 타나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라, 먼지 한 톨이라도 있으면 먼지가 될지도 몰라. 사람이 어떻게 먼지가 됩니까? 한심스러운 카게야마의 말에 니시노야가 끼어들었다. 다이치상이라면 가능할걸. 넷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보는 눈이 긴장해있었다. 다행히도 오케이였는지, 사와무라가 긍정의 소리를 냈다. 케이신이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체육관을 채운 목소리는 빗줄기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내 자전거! 히나타가 울상을 지었다. 멍청이, 잘 뒀어야지. 비웃음 소리에 다시 그르렁댄다. 신발을 신던 사와무라의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아, 엔노시타. 부럽네요 다이치상. 뭐가? 집, 가깝잖아요. 졸린 표정 위에 부러움이 겹친다. 아하하, 난감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엔노시타는 한걸음 앞에 선 주장을 쳐다봤다. '주장'. 언젠가 지나가며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스가와라 선배나 아사히 선배가 아니었다면, 주장의 앞에 한 글자가 더 붙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없는 카라스노의 배구는.
“다들 분주하네.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벌써 간 건가. 하여튼, 대단한 체력들이야.”
둘을 힐끔 본 케이신이 내일 보자란 말과 함께 지나쳐갔다. 할 말 있나? 답 없이, 엔노시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한 명 한 명 빗속을 내달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던 스가와라와 아사히가 서로를 마주 봤다.
“우리 먼저 가야겠네?”
“내일 보자, 다이치.”
“그래, 수고했어.”
덩그러니, 굳게 닫린 체육관 문 앞에 사와무라와 엔노시타만 남았다. 거세어진 빗줄기에 꼭 갇힌 느낌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건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엔노시타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다이치상.”
“응.”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뭐? 으음. 엔노시타."
“네.”
고민하는 표정이다. 사와무라가 입술을 물결 모양으로 만들었다. 만약 차기 주장을 뽑으라고 한다면 말이지, 표정과 다르게 망설임 없는 목소리다.
“난 당연히 너를 지목할 거야.”
“…저는 그럴 자격이 안돼요.”
“충분하다고. 자신감을 가져, 엔노시타.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럴 테니까.”
다들. 엔노시타가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이니어도 선수는 많다. 동료는 많았다. 뛰어나기까지 한 후배들도 있다. 안정적인 리시브도, 토스도, 스파이크도 할 수 없다. 눈앞의 남자보다 한참이나 아래인 그였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까? 엔노시타의 기습적인 말에 사와무라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 그의 어깨너머를 보는 눈동자에 빗줄기가 잡혔다. 배구, 그만하려고 했잖아요. 어, 어떻게 안거야? 당황한 목소리다. 엔노시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은 말이었을 뿐이다. 수많은 대화 속에서 그를 끌어당겼던 작은 대화.
“제… 저희에겐 주장이 필요해요.”
“엔노시타.”
“차라리 다이치상이 2학년이었다면…”
“엔노시타. 이건 당연한 거야. 3학년은 졸업을 해야 해. 그리고 뒤를 맡기는 거다. 나는 너를, 모두를 믿고 있어.”
사와무라가 말을 골랐다. 내리는 비에 가로막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진퇴양난이네.
“너는, 네가 걸어온 길을 가면 돼.“
“―다이치상.”
“지금까지 봐오고 느낀 것들, 배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 내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믿고 있으니까. 너희는 다시 돌아왔잖아?”
도망치는 건 쉬워도, 다시 되돌아오는 건 엄청 힘들다고. 어색하게 웃는 표정에 엔노시타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신의 말이 닿을지 모르겠지만 골라내 말하는 모습은 정말 그답게도 당당했다. 상대를 향한 배려, 그리고 확신. 아닐지도 몰라. 당신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부정의 끝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냐, 어쩌면.
당신이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와무라가 시선에 어색해할 즈음, 엔노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쯤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그래도 당신의 빈자리를 메울 순 없어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둔 거 같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다이치상.”
“어? 아냐. 이런 얘기 나쁘지 않다고. 내일 보자.”
“네, 감사합니다.”
어두운 주변에 사와무라가 묻혀갔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들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혼자 남은 엔노시타는, 그가 자신을 마주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몸을 돌려서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봐본다. 아.
빗물에 지워질 미소를 짓는다. 흔적이 자신에 의해 덮여도, 자신 안의 흔적은 덮혀지지 않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볼에 차가운 게 닿아 흘러내린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와무라와 엔노시타가 남아있다. 비어 있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남은 건 지나간 시간 속의 그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시간을 멈추는 것도, 그를 붙잡는 것도 불가능해. 볼에서부터 흘러내린 빗물에 미소가 씻겨나갔다. 빈자리를 메우는 일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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