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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binogi/N

[초대밀레] Return / 앵슷합작

* 앵슷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지루할 수 있음...

 

 

 

[초대밀레] Return

 

 

눈앞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몸을 잠식해오는 감정의 홍수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빠져들어 하나가 되어갔다빠르게 덮쳐온 그것은 성난 바다와도 같아 반항을 할 새도 없이 흐름에 쓸렸다. 격정적인 분노에 몸이 떨릴 즘에는 고요한 평안이 다가왔다.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 주인을 잃고 미쳐 날뛰는 말과 같아 혼란스러웠다. 어둡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물거품이 일 듯 생겨난 것들은 모든 것을 잠식하고 마치 이곳이 자신의 공간인 듯 행동하고 있었다. 물거품들은 각각에 다른 감정들을 갖고 떠다니며 궁금함이 들어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다가와 그 감정들을 자신에게 선사하듯 공중으로 터져서 얽매어왔다. 시작과 끝, 허무와도 같은 기억. 이것을 봐도 되는가? 라는 생각에 선택지는 없었다.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은 물거품은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검은색의 깃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은 여신이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읊조리고 있어, 상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여신은 오간데 없고 눈에 익숙한 이가 걸어 나왔다. 새하얀 빛과 함께 터지듯이, 그러나 조용하고 고요하게 나타난 그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모습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오로지 여신만을 눈에 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멈춘 그에게로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가 다가왔다. 스쳐 지나가거나 긴 인연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과 반대로 그들은 지나가지도 않았고 길게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저 하나씩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 둘의 빈자리를 메꾸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그 크기만큼의 공허함.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영원히 비어있을 자리를 바라보는 사이에 혼란이 물들었다. 희고 검은 것들이 군데군데 싹을 틔웠다. 가까이 다가가 싹으로 손을 내밀자 눈이라도 있는 듯 움직이며 노려봐왔다. 자아를 가진, 그래.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듯, 공연을 보듯 제 3자의 입장이었던 감정에 호기심이 동하고 있었다.

 

물방울들은 많은 것을 보여줬다. 기억의 주인이 만나온 사람, 보았던 것들, 느꼈던 감정, 순간순간의 감정까지. 소설을 읽듯 한 명의 인생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가 슬픔을 느낄 땐 함께 슬퍼하고 행복해야 할 땐 행복해하고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듯 그도 그렇게 조금씩 나아간다. 답답할 정도로 막막했던 감정이 천천히 그의 밖으로 흘러나와 점차 어른이 되어갔다. 단 하나만을 보고 곧게 뻗은 나무에 여러 갈래의 가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되어 굽고 굽은 가지들. 그것은 모든 것을 겪고 느끼며 만들어진 그의 감정들이었다. 쳐진 가지들은 곧 자신이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에 맞닿아 무서울 정도로 크게, 더욱더 높고 멀리 뻗어나갔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감정의 가지는 꿈을 꾸듯, 방관하고 있던 자신에게로 다가와 심장을 꿰뚫고 갈라져 옭아맸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부터 또 다른 것이 튀어나와 등에서부터 꿰뚫어 서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것들과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알 수 없는 것들이 피어나 이내 자신에게서도 무언가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고 동그란 열매가 안에서부터 방울방울 생겨나고, 겉으로 검은색의 수정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붉고 또 검은 것들이 몸을 뒤덮는 것을 바라보다 든 시선이 이쪽을 보고 있던 시선과 얽혀 들어갔다. 깊은 곳에서부터 뒤흔드는 시선에 그의 처음과 현재가 스쳐 지나가며 감정과 감정이 대립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감정들의 대립에 어지러워졌다. ……! 그 순간에 어깨를 쥐어오는 거친 손길이 몸을 뒤로 끌어당겼다. 공간의 주인이 다른 것에 이끌려 멀어져 갔다. 이어진 가지의 끝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해 보였다.

 

 

 

* * *

 

 

 

힘없이 늘어진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주변으로 흰색과 검은색으로 어우러진 구체들이 주변으로 생겨난다. 바닥을 향해 떨구어진 머리의 주변으로 쳐진 회색의 링과 전신을 휘감은 검붉은 색의 가시덩굴이 목을 감싸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손에 쥔 신살검이 그것이 밀레시안임을 증명해온다. 한때는 동료였을 이들이 그를 기점으로 둥글게 주위를 둘러싸고 눈치만 보는 와중에 그 사이로 푸른 망토의 남자가 검을 들고 걸어 들어왔다. 그의 주위로 퍼지는 위압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간다. 살과 살이 연결되어 붙어버린 눈이 그를 향하며 쏘아지는 힘에 손사래 치듯 허공에 대고 손을 털어낸 남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밀레시안.”

 

남자는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대하듯 친근하게 말을 걸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일그러진 표정의 밀레시안이 그를 정확하게 바라본다. 인간의 팔과 같은 모습을 한 손을 들어 뻗으며 다가오는 이를 남자는 한 걸음 물러나며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를 만나고 싶었다.”

 

씁쓸한 목소리로 작게 이야기한 남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쳐지는 신성력의 검을 옆으로 피하며 검에 힘을 집중했다. 정말로, 만나보고 싶었다. 남자의 눈앞으로 색을 담은 물방울들이 피어 올라 온다. 하나, 둘 뒤섞인 색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다. 조금씩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들의 너머로 자신이 이제껏 보고 싶어 했던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쏘아져오는 브류나크를 낚아챈 건틀릿이 붉게 물들어갔다. 쥐고 있는 왼손을 내리자 뒤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온다. 톨비쉬들은 살아있는 생물인 것 마냥 눈앞의 이에게서 벗어나려는 검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정보를 통해 들은 신살검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다. 건틀릿 안의 손이 상처 입었음을 짐작한다. 남자가 밀레시안을 앞에 두고 뒤로 고개를 돌려 톨비쉬들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이들이 무기를 쥐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다가와 밀레시안을 에워싼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겠다는 그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톨비쉬의 고갯짓에 밀레시안의 뒤에 있던 알터가 이를 악물고 그를 속박했다. ‘미안해요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이 자신을 속박해오는 신성력을 느끼고 천천히 팔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카즈윈과 아벨린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신성력을 끌어모으고, 피네와 톨비쉬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방패를 올렸다. 높게 치솟아 오른 신성력의 검이 양쪽에서 내리쳐지는 것을 본 남자가 몸을 낮게 숙이고 발돋움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린 밀레시안의 뒤로 여러 색상의 구체들이 맺혔다.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의 그 것은 세 속성을 담아 원래의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구체들과 함께 생전에 사용했던 퓨리 오브 라이트처럼 톨비쉬들을 향해 쏘아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피네의 방어막이 펼쳐지고 톨비쉬가 속성들이 스쳐 지나가고 남은 상처들을 치료하기 위해 움직였다. 밀레시안을 향해 뛰어가며 그들의 행동을 체크한 남자는 양 팔을 길게 뻗어 눈앞의 것에게로 돌아가려는 브류나크를 앞에 대고 그 뒤를 자신의 검으로 밀었다. 신성력을 아래로 집중해 폭발 시켜 그것을 발판 삼아 뛰어오른 남자가 밀레시안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

 

정확하게 밀레시안의 심장을 꿰뚫은 브류나크가 입을 열지 못하는 이를 대신해 검붉은 피와 함께 비명을 토해낸다. 그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온 남자의 검이 다시 한 번 꿰뚫린 자리에 박히고 주위에 생겨나있던 구체들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떨어지는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갑옷을 파고 들어오는 덩굴의 가시가 살에 박혀 아파왔다. 공격을 당함과 동시에 아래로 내려졌던 팔이 다시금 올라와 남자의 목을 쥐어왔다. 강한 힘에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브류나크를 고쳐 쥐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목을 찔렀다. 브류나크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마냥 목을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

 

손이, 아래로. 남자는 점차 걷혀가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탁하게 바래져있던 피부가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휘감고 있던 덩굴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 있던 물방울들이 아래로 내려와 차게 식어가는 밀레시안에게로 내려앉는다. 살랑이는 날갯짓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남자는 손가락 끝에 닿아 터지는 물방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눈에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가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 아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버린, 그리고 기억해버린 그는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품에 쥔 것을 끌어안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그 사이에 그들의 발끝에서부터 밀레시안의 몸으로 밀려들어갔던 물방울들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옹기종기 모여들어 커다랗게 변해 남자와 밀레시안을 가두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가가지 못하고 서 있던 톨비쉬들 역시 자신들에게로 다가와 감싸는 물방울에 한 명씩 한 명씩 잠들어갔다. 부서졌던 바닥이 모여들어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과거의 잔상들이 생겨났다 사라져간다.

 

 

*

 

 

돌아간 투구를 똑바로 돌려쓰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옷 위로 쌓인 모래와 먼지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곤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커다란 나무와 뒤로 돌아보면 마주하고 있는 은행, 그 옆으로는 식료품점과 또 그 옆의 잡화점. 분명 눈을 뜨기 전에 보았던 풍경은 이렇게 잔잔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애타는 마음과 식어버린 감정이었건만 어째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에 다시 한 번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모두 꿈이었던 건가? 가만히 생각하고 나니 그런 것 같다. 꿈으로 결론난 기억들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여 모래들을 털어냈다. 꽤나 생생한 꿈이 아닐 수 없군.

 

? 못 보던 사람인데안녕하세요?”

 

아래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자 허리춤까지 오는 꼬마가 둥글둥글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이질감에 한참을 시선을 맞추고 있으려니 뒤로 슬금슬금 멀어진다.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은 아닌 듯해 보였다.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이 한몫하겠지. 헝클어져 이리저리 뻗쳐있는 지저분한 머리에 드문드문 검게 변한 것들이 묻어 있는 옷에 눈이 찌푸려진다. 적어도 그 검은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입장에서 이 어린아이가 던전에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

 

너는 누구지?”

? ! 안녕하세요, 저는 밀레시안이에요! 그니까,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시려나? 여신님의 부름을 받고

밀레시안이라, 그렇군. 네가 밀레시안인가.”

 

밀레시안.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꼬마에게서 느낀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와 더불어 지금보다 큰 꼬마의 식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자신이 생각났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꿈에서 보았던 그 자가 이 꼬마겠지. 끝에서야 깨닫고 나서야 후회한 자신이 원했던 것. 분명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건만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간지러움. 이상하게도 현실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인데 언젠가 느껴보았던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손을 뻗어 볼을 건드리자 꼬마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머릿속 한구석에 이번에는 제대로그래, 생각했던 결말을 내리라 마음먹는 자신이 있었다.

 

 

*

 

 

밀레시안은 자신의 옆을 스치는 망토의 흔적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사이에 달려오던 몬스터의 목에 검을 박아 넣고 반동으로 몸을 공중에 띄워 옆의 몬스터 역시 발로 차 눕혀버린 남자가 가볍게 땅으로 착지함과 동시에 등을 돌린 상태에서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들어 반대쪽 손으로 넘기고 팔을 뒤로 돌려 눕혀졌던 몬스터가 일어나는 순간에 횡으로 베어버린다. 자리에 멈춘 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을 멍하니 지켜보던 밀레시안이 우와……하며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 역시 대단해요!”

기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다.”

지금까지 제가 본 기사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는걸요? 아저씨는 엄청 대단한 거 같아요!”

 

쓰러진 몬스터들을 흘긋거리며 연신 대단하다고 칭찬 해오는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남자는 검을 한 번 털었다. 묻었던 피들이 공중으로 날리고 몇 번을 더 털어 완벽하게 전부 없앤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밀레시안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정해져있으나 가는 길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은 그들이 좀 더 오래 있도록 해주었다. 정하지 않은 것은 고의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주 잡은 손에서 퍼진 온기가 서로를 감싸고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붙어있는 거리만큼이나 좁혀진 마음과 마음 사이에 내려앉은 온기는 불만이라도 생긴 것처럼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반호르에 도착하겠군.”

정말요? 이제 거의 끝나가네요! , 끝나가는구나.”

. 여행이 끝나는 게 아쉽나? 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나가려던 말을 가까스로 붙잡아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투구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뒤집어진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평온해 입술이 뒤틀렸다. 잡고 있는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끝이 보일수록 발을 구르게 되는 것은 자신 혼자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쓰렸다. 언제 온기가 앉았냐는 듯 식어버린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지.”

여기, 서요? 주위에 몬스터도 있는데?”

이 지역엔 딱히 쉴 곳이 안 보이는데.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긴 하지만 그래도 2일에서 3일은 걸릴 거다. 가겠다면 나야 상관없다만.”

 

주위를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보던 남자가 낮게 소리를 내며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밀레시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위험한 잠자리와 강행군 속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이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에게나 남자에게나 노숙을 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주위의 몬스터였다. 밀레시안의 생각을 눈치 채곤 풀 죽어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은 남자는 작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신성력 수련은 잘 하고 있나?”

!”

, 분명 꽤 지난 걸로 아는데 아직도 인가.”

, 하하, 하하하하! 뭐라도 먹을까요? 뭐 드실래요?”

밀레시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도록 눈을 굴려대며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만다. 귀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으응, 미안해요.”

아니. 널 혼내려 한 게 아니니 미안해하지 마라, 밀레시안. 다만 조금만 빨리 익혔으면 좋겠군.”

네에, 노력해볼게요!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잠자리를 정리하고 밀레시안이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남자는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았다. 멀리서 몬스터들이 이쪽을 흘금거리다 낮게 깔려 자신들을 위협해오는 기에 슬금슬금 멀어졌다. 주변에 다가올 몬스터의 위험이 더 이상 없는 걸 안 남자의 눈이 붉은 계열로 빛을 내는 불로 돌려졌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평정심과 다르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초조함의 무언가는 점차 커져서 불안하게 만들어 와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저 녀석 때문인가.’

 

어쩌면 이 초조는 처음부터 있었을지도 몰랐다. 눈을 떠 밀레시안과 만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 그는 고민했다. 어째서? 자신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초조해야 하는 건가? 꿈 때문이라면 억울할지도 모른다. 고작 꿈 때문에.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이 초조함을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몰랐겠지만 그런 생각을 진심으로 하며 누군가를 원망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밀레시안을 닦달하는 이유도 이 이상의 함께라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남자는 가만히 나뭇가지를 들어 장작을 뒤적거렸다.

바람소리조차 없는 조용한 분위기를 깨듯 나무 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 왔다. 끈끈한 점액이 눈꺼풀을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둘러본 풍경은 몬스터가 없는 평지였다. 몸을 일으켜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잠들기 전 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대충 계산해 보았을 때 자신이 지금 일어났다는 것은 슬슬 교대를 해야 할 시간이거나, 그 시간으로부터 조금 지났거나. 그는 침낭에서 빠져나오며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교대할 시간이죠?”

아아. 일어났나? 좀 더 누워있었어도 상관없었다만.”

아뇨! 정해놓은 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니까요! 피곤하지 않아요? 주무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밀레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는 그의 외침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자리를 정리하고 남자의 옆으로 와 앉은 그는 남자를 툭툭 건드리며 침낭 쪽으로 눈짓했다. 어서 가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에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걸음을 옮긴다.

 

, 밀레시안.”

 

누울 지 앉아 있을지 서 서 고민하던 남자가 자신을 보며 부르는 목소리에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바닥에 장난을 치던 밀레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어쩐지 조금 멍청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제 목을 쓸어내린 남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해라.”

? 뭘요? 수련이라면 열심히 하고 있다니깐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겠다만.”

아저씨도 열심히 해요! 이제 반호르로 가면 안녕이잖아요?”

 

남자는 밀레시안의 마지막 말에 눈을 감았다 떴다. ‘안녕이잖아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던 초조함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 하늘 아래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겠지만입안이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남자가 손을 들어 제 가슴 부근을 누르듯 짚었다.

 

안녕이라그렇군.”

괜찮아요. 또 보면 되니까!”

네가 긍정적이라 다행인가. 그럼 하나만 약속하겠나, 밀레시안?”

? 뭘요?”

기다려주겠나.”

 

밀레시안은 남자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알았다는 듯 눈을 뜨며 끄덕였다. 당연하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뱉어진 대답이 시원했다. 남자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괜찮았다. 자신이 안녕이라고 이야기 하긴 했지만, 반호르에 도착해서도 다시 물어볼지도 몰랐다.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지 않겠냐고.

 

걱정 마세요! 제가 꼭 기다려 드릴 테니까요. 아저씨야말로, 먼저 어디론가 가버리지 말라구요. 내일 일어나서도 여행하면 되는 거니까!”

네 말이 맞군.”

 

자신의 불안을 속으로 삼키며 남자는 투구를 벗어 옆에 두었다. 건틀릿에서 손을 빼내어 이마를 문지르며 하늘을 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뉘었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젠가 헤어진다, 라는 생각이 전제하에 깔린 여행이었고 동행이었으니까. 지금 서로는 아니 자신 혼자 일지라도 좀 더 이 일상이 이어졌으면 하고 생각을 하겠지만. 이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거둬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눈 위로 약속이나 한 듯 잠이 내려앉았다. 잘 자요, 아저씨. 밀레시안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끌어안고.

 

떨어지는 고개에 화들짝 놀라며 밀레시안이 습관적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이 내려앉은 라인알트는 늑대와 코볼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침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찬 공기만 내려앉아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보곤 작게 소리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가셨지? ? 분명 자연스러웠던 생각은 어딘가 어긋난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떠올렸던 인물이 누구였는지,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던 건지 혼란이 오는 기억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 다 타고 남은 새까만 장작과 잠들었다 깬 자신만이 있어, 그는 꿈을 꾸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처음부터 혼자 했던 여행이었잖아?

 

좋아, 그럼 반호르로 가볼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움직이는 밀레시안의 뒤로 기억의 흔적이 남아 흔들거렸다.

 

 

*

 

 

남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웃었다. 벽에 기대어 무너지듯 주저앉는 그에게서 금속 특유의 부딪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도, 잠과 함께 내려앉던 아이의 목소리도, 차갑고 울퉁불퉁한 바닥의 느낌도 전부 꿈이었던 것 마냥 존재하지 않았다. 잠들기 전 자신이 느꼈던 불안과 초조가 이런 것이었나. 그는 눈을 떴을 때부터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물방울 모양의 오색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내가원했던 것은

 

펼쳐져 있던 손을 말아 보석을 움켜쥐며 무엇을 다짐이라도 한 듯 그의 눈이 빛났다. 푸른색의 투구 솔이 흔들거리고 남자는 다른 손을 들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문질렀다. 자신이 꼬마의 모습을 한 밀레시안에게 가르쳤던 신성력과 스킬을 떠올렸다. 어디로 가게 되던 그래, 그렇다면. 천천히 눈을 감는 그의 주위로 보석에서부터 시작된 방울들이 그때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벽이라 생각했던 것이 천천히 무너져갔다.

 

그는 계속해서 보석을 사용했다. 처음과 같은 실수는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행동했다. 물방울들이 인도한 시간 속에서 남자는 살아 움직이는 밀레시안을 보았다. 봉인 되어 있던 때에 억지로 보게 되었던 이의 기억, 아니 생의 어딘가로 스며들어 그와 함께 했다. 비록 자신이 되돌아올 때마다 밀레시안은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만.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보석은 점차 빛을 바래갔고, 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자는 흘러가는 물을 보며 그 아래쯤에 있는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큰 키에 달라진 외형, 분위기. 모두가 처음 보는 생소한 이로 대했어도 그는 그것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지며 은회색으로 빛나는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마지막이군.

 

밀레시안.’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어 들어 올린 그는 그것에 작게 입맞춤하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느끼는 모든 감정이 담긴 단 한 번의 행동.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허리를 숙여 흐르는 물에 손을 집어넣은 남자는 쥐고 있던 주먹을 펴 물의 흐름에 목걸이를 맡겼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남은 것은 밀레시안과 그리고, 이제부터 흘러갈 시간이었다.

 

기다리겠다.’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의지할 곳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흘러 내려가고 있는 목걸이를 따라 마치 생명을 가진 듯 빠르게 움직여 부딪힌 것은 밝은 빛무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

 

 

길의 끝에는 거대한 것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밤의 하늘이 뒤덮여 푸른색의 심장을 가진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하며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거대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심장과 연결되어 뒤로 뻗어진 네 쌍의 날개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을 녹이고 있는 진액이 흘러내려 떨어지고 있다. 새파란 진액이 눈과 심장 대신에 피와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의 머리에 씌워진 것은 투구의 모양으로 입 부분을 제외하고 나무의 뿌리처럼 얼굴과 연결되어 있었다. 투구라기보단 철통을 씌워놓은 것처럼 공기가 통할 틈조차 없는 얼굴이 그때까지 허공을 향해있던 목을 움직여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들로 시선을 돌렸다눈이 있는 부위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 나름의 시선.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보다 왜소하고 인간의 육신을 한 그것은 부자연스럽게 꺾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쇠를 쇠로 긁는 듯 한 거칠고 소름 돋는 목소리는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발끝부터 올라오는 혐오감에 몸서리쳤다. 정말로 지금까지의 적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리부터 늘어진 푸른빛을 띠는 베일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무너지는 듯 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응할 시간도 없이 내리쳐진 커다란 검에 올려다보던 이들이 황급히 양옆으로 몸을 굴려 피한 뒤 일어나 연기가 걷히고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피어올랐던 연기가 가라앉고 땅에 박힌 커다란 검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원래의 크기에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검이 움찔하더니 조금씩 땅에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감각에 흠칫하며 검의 왼쪽에 있던 이들이 몸을 낮게 숙이자마자 땅에 박혀있었던 검이 그들의 머리 위를 갈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신들의 몸이 두 동강 났을 거라 생각하며 헛숨을 삼켰다. 돌아갔던 검을 다시 회수한 그것이 앞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밀었다. 그저 허공에서 걸음을 옮기듯 옮겼을 뿐인데 기운에 짓눌린 바닥이 얕게 패이며 자국을 만들어냈다. 바닥에 눕듯 엎드린 상태로 있던 이가 그 움직임을 지켜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을 빼어 들어 그것에게로 다가갔다. 아까의 공격으로 패어진 중앙을 보고 있던 비틀린 시선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에게로 돌려졌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을 향해 늘어트리며 대각선으로 몸이 움직였다.

 

밀레시안님

 

등 뒤로 들려오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괜찮다는 듯 손이 허공을 젓는다. 밀레시안은 손에 들린 브류나크와 눈앞의 것을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힘을 끌어올렸다. 콰앙, 주변의 공기가 폭발하는 큰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밀레시안을 향해 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등 뒤로 새하얗고 반투명한 두 쌍의 날개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발밑을 넘실거리는 검은 것들이 집어삼키려는 듯 손을 내뻗어오며 검은 웅덩이를 만들고 날개에서도 그에 화답하듯 새까만 깃털들이 떨어졌다. 신의 힘을 쓴 밀레시안의 모습을 보며 뒤에 있던 이들이 자세를 갖췄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짓하고 각자의 자리를 잡는다. 언제라도 움직임에 맞춰 행동할 수 있도록 들고 있던 무기를 고쳐 쥐고 곧 이어질 전투를 기다린다.

 

예전엔 인간이었을 그것과 밀레시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그 것은 밀레시안의 시선을 느끼며 느릿하게 얼굴을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밀레시안이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에 이내 그것이 입을 벌리며 웃었다. 살과 살이 고무처럼 늘어나는 그 흉측함보다도 즐거워하는기색이 느껴지는 웃음에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잡은 밀레시안을 보던 그것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며 검을 든 손을 느리게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알터!!”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여인의 목소리가 대기를 찢는다. 붉은색의 피가 공중에 흩뿌려지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는 듯 당사자인 알터의 얼굴에는 물음을 구하는 듯 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다. 놀라 고개를 돌린 밀레시안의 시야에 정확히 일직선으로 반이 갈려있는 기둥이 보였다. 발 빠르게 남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알터를 잡고 피하지 않았더라면 알터는 이미 반으로 잘려나갔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빗겨 나갔음에도 배에서부터 어깨까지 검상에 피를 흘리는 양을 보아 꽤나 깊게 베인듯 했다. 언제 다시 해올지 모르는 공격에 다른 이들이 섣불리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 하자 밀레시안이 자신과 반대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톨비쉬, 부탁해요.”

. 아벨린, 피네! 동요하지 말고 밀레시안님을 부탁드립니다.”

 

밀레시안의 말에 끄덕인 톨비쉬가 남빛 머리카락의 남자와 알터에게로 다가가 자리를 바꾼다. 남자는 원래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톨비쉬는 알터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다시 그것에게로 시선을 돌린 밀레시안은 검을 쥔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셀레스티얼 스파이크를 사용했다. 속박인 알터가 다친 시점에서 자신이 함께 기사단들과 협동 공격을 해야 했다. 그의 움직임을 기점으로 선홍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본인의 자리에서 저지먼트 블레이드를 사용하고 남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것을 향해 쌍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몸이 밀레시안의 힘에 의해 더욱 느려져 그것이 움직이기도 전에 남자가 깊숙이 파고들어 검을 휘두른다. 베인 틈으로 흘러나오는 액체에 빠르게 발을 바꿔 뒷걸음질 치듯 뒤로 물러난 남자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검에 붙어 움직이는 피를 털어낸다. 남자가 물러남과 동시에 거대한 검이 하늘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내리쳐졌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뒤로 조금 물러난 것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듯 했다. 셀레스티얼 스파이크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자 밀레시안이 여인과 남자에게 고갯짓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밀레시안은 조심스럽게 그것의 앞으로 걸어갔다.

 

만나고 싶었어요.”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밀레시안이 입을 연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은 그는 자신을 향하는 얼굴을 보며 천천히 팔을 들었다. 지금까지 항상 궁금했었어요. 일직선으로 브류나크를 세워 든 모습에 그것이 느린 걸음으로 밀레시안을 향해 다가갔다. 벌어져 있던 입이 굳게 다물리고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린 채.

 

그렇다고 제 사람을 건드린 당신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에요.”

 

꼿꼿하게 세워 들었던 브류나크가 밀레시안의 손을 떠나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간다. 높게 치켜든 손에서 흘러나온 빛 무리들이 곧장 날아갈 창처럼 상대를 향해 있는 브류나크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빛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다. 그것을 차갑게 노려보는 밀레시안의 눈동자처럼. 자신에게 쏘아지는 차가운 기백에 그것은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인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밀레시안이 의아하기를 잠시, 다물렸던 입이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허나 말이 되기 전에 공중으로 퍼져버린 단어들로 인해 문장은 완성되지 못 했고 밀레시안은 그저 독백으로 치부해버리기로 했다. 일일이 하나하나 전부를 들어주기엔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알터가 신경 쓰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소년의 눈동자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었을 뻔했기에. 얼룩진 감정들 사이에서 자신을 붙잡은 이들을 밀레시안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신만 없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공기 중에 흰 파문을 일며 정확하게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것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엇에도 막히지 않고 가볍게 푸른 것을 꿰뚫었다. 되돌아온 브류나크를 손에든 밀레시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다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은 고개를 숙여 구멍 난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보았다. 진득한 액체들이 모여들어 구멍을 메우려는 듯했지만 스파크가 일어나며 산화해버린다. 신의 신성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몸이 브류나크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치유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밀레시안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이며 파이널 히트를 사용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하기 위한 그가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치료가 끝난 알터가 톨비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괜찮겠나?”

! 괜찮습니다.”

그럼.”

 

내려놓은 검과 방패를 집어 든 톨비쉬의 뒤를 따르는 알터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밀레시안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간 푸른 액체가 떨어진 바닥이 부식되어 가는 것을 보며 들고 있던 블레이드를 고쳐 쥔다. 역시 밀레시안님은 달라. 소년은 저것을 비켜내지 못할 자신을 떠올리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최우선은 모든 이들의 안전, 밀레시안님을 지키는 것. 그들의 앞에 서 있던 피네가 톨비쉬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앞에 서서 실드를 사용한다.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액체들이 실드에 맞고 비켜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들이 밀레시안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톨비쉬! 알터!”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 괜찮?!”

 

옆으로 다가온 톨비쉬에 밀레시안의 굳어져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상대를 향해 움직이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해가 떠 있는 한 낮의 꽃들처럼 생기가 살아난다. 전투 중임에도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말에 곁눈질하며 웃던 밀레시안은 지금까지 아무런 반항 없이 자신의 공격을 받던 그것이 날개를 움직여 쳐내는 것을 막지 못하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몸에 들러붙은 진액들이 자신을 변질시키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브류나크로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눈에 높이 몸을 띄운 그것이 보였다. 난도질당한 밤하늘 사이로 빛이 쏟아져 내리는 착각에 빠지길 잠시 다시 한 번 위로 올려진 검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에 서리기 시작하는 푸른빛이 내뿜는 기운에 몸이 저릿했다. 그제야 저 일격에 서린 살기를 읽어낸 톨비쉬들이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그대로 멈춰 서 있다면 지키려 했던 행복이 멀어지지 않겠나?

 

귀를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밀레시안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언젠가 들어보았던, 잊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가렸다. 강하게 자신을 밀어냈던 목소리는 이제 빼앗기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조롱하며 비웃고 있었다. , 어째서, ? 의문이 입안을 맴돈다. 왜 자꾸 내 행복을 빼앗으려 드는 거야? 머릿속이 뒤엉키고 끝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잃어버리고 놓쳐버렸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애써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빛에 닿아 녹아내린다. 당신이 그들과 다른 게 뭐야? 갈 곳 잃은 분노가 눈앞의 이에게 향한다. 흐릿해져가는 신의 힘을 느끼며 밀레시안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당신이 자초한 거야.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거대한 검에 서린 신성력이 다시 한 번 강하게 허공을 가르고 그 사이로 새하얀 빛이 파고들었다. 신성력을 막아내는 피네의 방패가 깨어져나가는 것을 본 톨비쉬가 그녀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맞잡고 의식을 집중했다. 깨어져나간 파편들이 부스러지고 그 자리를 푸른 신성력이 대신해 채워지며 다시 실드가 굳건해졌다. 감사의 미소를 짓는 피네를 흘긋 본 톨비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그것과 밀레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려쳐지던 검을 온몸으로 막아낸 밀레시안의 손에서 흰빛에 감싸인 검이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기사단의 문장이 십자 모양으로 박힌 커다란 손이 머리를 가림과 동시에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을 담아 울려 퍼졌다. 검 아래서 힘겹게 서 있는 밀레시안을 본 그것은 조금 더 강하게 검을 쥔 팔에 힘을 주어 내렸다. 파삭파삭- 마치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 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꺼지며 밀레시안이 가라앉는다. 고통스러워하는 눈동자가 그것을 향하고, 가려진 손등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눈동자와 마주함과 동시에 시선이 사라지며 검을 막고 있던 손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세를 잃지 않고 맹렬히 돌진하고 있던 검이 정확하게 그려진 선을 따라 방해물이 없어진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검에 서린 신성력이 사그라들고 치솟아 있던 날개가 땅을 향해 늘어진다. 억누르던 힘이 가벼워짐을 느낀 밀레시안의 눈에 추락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빠르게 떨어지는 그것의 몸에 붙어 있던 푸른 진액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그 안에서부터 원래의 모습이었을 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초대단장.”

 

진액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어느새 물방울이 되어 인간의 형태를 띠어가는 상대를 감싸 안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톨비쉬들은 상대에게 달라붙은 것 말고도 아직까지 공중에 남아 있는 진액들이 밀레시안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보며 움직였다. 아직까지 완벽하게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밀레시안의 옆으로 가 진액들을 쳐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 , 레시안님!?”

 

자신들을 통과해, 아니 마치 허상처럼 자신들의 몸을 통과한 진액은 가만히 싸우던 상대를 보고 있는 밀레시안에게 달라붙었다. 당황해하는 알터의 외침에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본 밀레시안의 눈에 진액이 흘러내리며 푸르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진액이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시간이란 거대한 흐름이 되어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것들은 때때로 붉은색이 되기도 했고, 푸른색이 되기도 했다가 초록색이 되곤 했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담아 놓은 흐름은 주변을 맴돌다 이내 커다란 파도가 되어 밀레시안을 덮쳐왔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새까만 어둠, 그리고 그 속의 누군가. 누군가는 자신처럼 이 흐름에 휩쓸려 많은 것들을 보았다. 어리숙하고, 바보 같고, 한없이 멍청하기 짝이 없고, 부탁을 거절할 줄도 모르며, 그 속에 상처받고 휘둘리기만 하는 이의 일생. 어둠 속의 이는 그 생을 보며 붉게 물들어갔다. 감정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원하지 않았는데 생겨나 그를 집어삼켜버렸다. 흐름이 끝났을 때 보인 것은 빛이었다. 그는 그 빛에서 어둠 속에 있을 때보다 더욱더 절망하고, 힘들어했다. 흐름이 보여줬던 이가 모든 것에 져버려, 결국은 자신이 가졌던 감정을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렸으니까. 부서진 감정의 파편을 끌어안고 그는 자신이 하는 신을 향해 빌었다. 요구했다. 그리고 신은 자신의 피조물이 빈 소원을 들어주었다.

 

거짓,

 

그는 어린 감정의 파편을 만났다.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지고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행복해했다. 즐거워했고, 놓치고 싶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흐름 속에 그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되돌아와 그 행복의 순간이 무엇인지 깨달아버린 그의 모습은 감정이 부서졌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는 그러고 나서도 계속해서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튕겨 나온 끝에 남는 것은 허무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 왜 그랬어요?’

 

흐름과는 별개로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감정에 고개 숙였다. 왜 몰랐을까. 어째서 몰랐을까. 밀레시안은 자신이 한없이 바보 같았다. 결국, 자신은 잃어버리기만 하는 것인 걸까. 떠나간 것들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떨려오는 몸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흐름이 감싸 안아 왔다.

 

단장님.”

 

손을 내린 밀레시안의 앞에는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이 아니었어. 자신을 말리려는 이들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그는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금이 가 있는 투구를 내려다보며 무릎 꿇고 앉은 밀레시안이 그것을 쓰다듬었다. 불이 꺼져가는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 레시, . 끊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멈췄던 감정이 울컥 터져 나왔다.

 

아저씨.”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뭘 놀라요? 장난스럽게 웃는 입꼬리의 끝에서 터져 나온 감정이 떨어져내렸다. 투구에 스며들지 못하고 비껴 흘러내린 것이 마치 닿으려 해도 닿지 않는 자신들 같아 서글펐다. 왜 그랬어요. 힐난의 목소리에 남자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내가, 나는, 나는요몰랐, 몰랐어요. 단장님이, 단장님이 항상 있었는데, 지금까지 항상 옆에, 있었는데, 몰랐어, 하나도, 몰랐어.”

 

고개 숙인 밀레시안의 어깨가 떨려왔다. 남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런데 결국 자신은, 그런 남자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자신은 남자를. 가만히 멈춰있던 그가 돌연 듯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브류나크를 손에 쥐었다. 남자를 감싸고 있던 물방울들이 남자의 감정을 대변하듯 일제히 떨려왔다. 안된다고 외치는 것 같아 밀레시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없는 곳에서, 이런 목숨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

 

주인의 피를 머금은 브류나크가 붉게, 붉게 물들어갔다. 물방울들이 터져나가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무엇을 위해서?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허망한 표정의 톨비쉬들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깨어져버린 감정의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를 위하여? 이제는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을 주울 수도 없어진 몸으로 그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 이제까지, 자신은 대체,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물방울들이 다시금 흐름으로 변해가며 그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잡을 수 없다면 잡을 때까지. 거부하듯 붉은색으로 변한 흐름에 남자는 입술을 악물었다. 네 손을 잡을 수 있는 세상을 원해.

 

그를 돌려주십시오, 신이시여.’

 

 

 

미포 1491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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