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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binogi/N

[카즈톨비] 묻어두었던 감정

 

 

 

[카즈톨비] 묻어두었던 감정

 

 

어쩌면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아닐 거라고 외면해왔던 감정이었을지도. 깨달음이 늦었다? 아니,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던 거다. 거부하고, 등을 돌렸으니 늦을 수밖에. 목에 걸린 숨을 끌어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바닥으로부터 느껴지는 물기에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가고, 입안의 살이 깨물렸다.

 

나는, 당신을 가질 수 없어.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자괴감에 몸서리 쳐졌다. 이제야 파도처럼 밀려오는 후회가 자신을 비웃었다. 마주친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나서야, 안된다고 생각해버렸다. 떠난다라고 인식한 그 찰나에 스쳐 지나가듯 잡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추악하게만 느껴졌다. 비에 젖어 떠내려가는 짐승의 흐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발아래에 힘없이 늘어져 꺼져가는 불씨를 품에 안고 끝을 바라보는 노란 나비가 보였다.

 

여기면 안전하겠군.”

 

안전?

 

나비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다. 고여 있던 물들이 곧 다가올 파도에 긴장하며 서로를 붙잡는다. 당신이 말하는 안전은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인가.

 

쉬어라.”

 

저 멀리서 자신들을 찾아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짙은 잿빛의 수정으로 빛나는 날개를 흔드는 적으로부터의 안전이라면 쏟아지는 비가 자신들을 씻어 줄 테니 안전하겠지. 하지만-. 눈썹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흔들거리는 빗방울이 시야를 뭉그러뜨렸다. 먹물로 점칠 된 세상에 당신은 뭉그러진 시야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손이 닿으면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먼 우주의 푸른색별처럼. 당신은 알고 있을까, 나에게 위험한 것은 밖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괴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금방이라도 닿을 듯 지척에 있는 당신이라는 것을.

 

카즈윈.”

 

당신이 뜨겁게 타오르는 젊음으로 가득한 별이라면 이 감정은 붉게 물들어 꺼져가는 한순간일지도 모른다. 다가가면 잡아먹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릴 테지.

나무판자가 비스듬하게 엇갈린 틈새로 새하얀 색의 동공이 닿았다 떨어져갔다. 얼룩진 창은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자신들의 방패나 다름없었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뭐지?”

 

당신이 기대어있는 자리의 수분이 메마르고 있지 않을까 했다. 긴장으로 굳은 입술을 축이려 혀를 내밀고 나서야 마른 것은 이쪽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입술의 사이로 스며들어 입을 열라고 부드럽게 두드려왔다. 이 안에 담긴 말은 뱉고 나면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피네와사귀기로 하신 겁니까?”

.”

 

매달려있던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평평했던 지상에 굴곡이 생기자 재미있다는 듯 그 사이로 뛰어나왔다. 짙은 남색의 밧줄을 놓쳐버린 손이 허망하게 내뻗어지고 벽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래로, 아래로.

일그러진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에 자신은 많이 지쳐있었다. 순간적으로 놓친 눈동자의 움직임은 어느새 가시와도 같은 눈을 피해 짙은 고동색의 벽을 바라보며 숨어들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저희는신에게

퍽이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땀조차 말라버린 손을 쥐었다 펴며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예상했던 반응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시뮬레이션과 다르게 다가왔다. 현실은 생각만큼이나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칼에 베이듯 벌어지는 상처를 비집고 검게 곪아 터진 감정들이 기어 나왔다. 눈 녹듯 사라지는 용기에 희미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의 눈매가 의문을 담는다.

 

융통성 있다는 말을 듣는 저로써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당신은 하고 있군요.”

무슨 말이지?”

줄곧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 시작하고 나니 그다음 말을 이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심장에서부터 식도를 타고 끈질기게 올라온 감정들이 혀를 제멋대로 움직여 밖으로 도망치듯 굴러 나온다. 결국 결과는 자신들이 숨어있던 심장에게로 돌릴 것이면서.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당신이 걸려있었습니다. 이미 늦어버렸겠지만.”

이봐.”

신에게 받쳐진 몸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말에 숨어 있었던 겁쟁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비겁하게 뒤돌아 도망쳐왔던 겁니다. 제 감정으로 부터요.”

.”

알고, 있습니다. 늦었다는 것도 제가 당신을 축하해줘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카즈윈. 당신에게 일찍, 제가 이 감정을 좀 더 빨리 받아들이고 이야기했다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요.”

 

이미 흘러간 시간을 잡아보려는 부질없는 자신의 손을 쳐내며 도망갈까 마음 졸이며 감춰놨던 감정들이 빠져나가 비어버린 심장에 스며드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옷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듯 제 목을 졸라오던 비가 떠오르는 햇살에 놀란 발걸음으로 이곳저곳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당신의 뒤로 다가온 햇살은 어두운 그림자와 손을 잡고 무거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열릴 듯 말 듯 달싹거리는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당신은 희한하게도 아래로 갈수록 수면과 가까워졌다.

 

글쎄.”

 

수면 위로 보일 듯이 헤엄쳤던 물고기가 다시 심연 속으로 숨어들었다. 잠깐의 파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고요한 물결이 되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당신은 밖이 보이는 유일한 창문을 향해 비스듬하게 몸을 돌렸다.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완벽하게 돌아선 당신의 머리에서부터 어둠이 내린 모습은 마치 자신이 심연 속에 갇혀 헤어 나올 수 없는 물고기가 된 것만 같았다. 빛도 들지 않는 한없이 어둡고 차가운 공간에 혼자.

 

내가 접었으니.”

 

비구름은 이미 흘러가 청명한 하늘은 눈이 아리도록 푸른색이었다. 당신의 발걸음에 힘없이 부서지는 낙엽들이 닿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제 마음과도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 아래 둘만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는 상황이 꼭 다른 이는 모르는 서로가 가진 기억의 일부가 된 듯해 기분이 묘했다.

처음은 분명 같은 것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당신과 내 시선은 전해지지 않은 체 우리의 중간, 그 어디쯤에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겁쟁이였고 어리석은 도망자였기에, 그 시선은 그렇게 길을 잃고 떨어졌을 테지.

 

좋아했다.”

 

이 문을 나서면 무언가는 변하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을 관계였다. 당신의 심연은 지금까지처럼 한없이 어두울 테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은 푸른 초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하늘의 태양만을 바라보게 되겠지. 문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천천히 밖을 향해, 당신의 등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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